충현서원
충현서원 유적(忠賢書院 遺蹟)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충현서원의 유적이다. 1984년 7월 26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기(1523∼1591)가 중국의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기는 서경덕, 이지함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지리산과 계룡산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한 분이다. 처음에는 ‘박약재’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이존오·이목·성제원 등을 추가로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광해군 2년(1610)에 복원하고 조헌을 추가로 모셨으며 인조 3년(1625)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충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뒤 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지방 유생들을 교육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6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전∼공주간 국도에 인접하여 세운 이 서원은 사당과 재실, 서원의 유래를 적은 비석들로 구성된 조촐한 규모이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인데 안쪽에는 주자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7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충현서원을 세우기 전 서기는 직접 중국 명나라에 세 번이나 들어가 자료와 서적을 모으고, 여러 학자들과 함께 주자학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나라 때의 유학자로 중국의 유학을 하나로 정리한 주자(朱子, 1130~ 1200)의 학설에 크게 감명받았다. 때문에 평소 ‘주자는 공자의 뒤를 이은 성현이니 공자를 배우고자 하면 주자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하곤 했다. 서기는 주자 초상화를 벽에 걸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이것이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건립된 충현서원의 시작이다.
충현서원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둠배산 아래에는 지리산에서 은거하던 서기가 처음 계룡산 공암에 터를 잡고 강론을 펼치던 연정(蓮亭)이 있다. 서기는 1577년(선조10) 4월 연꽃이 가득 핀 연모 뒤에 서당 세 칸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아마도 그가 공암으로 들어온 1570년 중반쯤에 연정의 기원이 되는 작은 서당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가져온 주자 영정을 처음 걸어두었던 곳도 이곳이다.
연정에서 강학이 시작되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여러 고을에서 학문을 배우고자 연정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고,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 공암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공암서원을 거쳐 충현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공암서원이 세워진 후에는 연정을 ‘박약재(博約齋)’라 불렀다 한다.
고청 서기 (徐起. 1523~1591)
이천서씨 문목공파
조선 중기의 학자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제자백가는 물론 실용적인 이론에도 박학하였다. 공암에 거처를 마련하고, 1591년(선조 24)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강학 활동에 매진하여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름난 제자로는 이득윤, 송이창, 박희철, 박희성,송시열,송준길,김장생 등이 있는데 이득윤은 왕자의 사부가 되었고, 송이창은 송준길의 아버지이자 송시열의 스승이었다. 또한 박희철은 이유태의 스승이고, 박희성은 충현서원의 중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정묘호란 당시 김장생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송이창은 스승에 대해 ‘선생이 계실 때는 우리의 도가 여기에 있었는데, 선생이 가시니 우리의 도가 비었도다.’라고 회고하였다. 고청 서기는 평생을 학문연구와 강학에 전념하여 충남의 사림 문화 형성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925년에 훼철되었던 사우가 복원되면서 다른 향현(鄕賢)과 함께 제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족관계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조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
증조할아버지: 서찬(徐讚 참봉)
할아버지: 서승우(徐承佑. 남재.부인은 한산이씨)
아버지: 서구령(徐龜齡)
본인: 서기(徐起 고청(孤靑))
아들: 서홍덕(徐弘德 광흥봉사(廣興奉事). 왜란 때 적과 싸우다 순절)
아들: 서홍도(徐弘道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자: 서연(徐璉 인재공(仁齋公)
손자: 서수(徐璲 의재공(義齋公)
손자: 서진(徐璡 예재공(禮齋公)
손자: 서정(徐珽 지재공(智齋公)
공(公)은 조선시대 학자로서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孤靑) · 고청초로(孤靑樵老) 등으로 불리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중종 18년(1523) 서귀령(徐龜齡)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의 나이 7세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했는데 금세 통달해 버리고,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올려 "스승님은 제 말을 허물하지 마시고 저로 하여금 성현서(聖賢書)를 읽게 해 주소서." 하였다. 스승은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면서 비범한 아이임을 깨달았다. 10세가 되면서 화담(花潭)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이론과 기술까지 통달하였다. 공의 나이 20세가 넘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 선생을 만나 오도(悟道)의 바른 것을 배우면서 특히 스승과 뜻이 맞아 스승과 함께 한라산 등 각지를 유람하면서 민속과 실용적 학문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후 공은 토정과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3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 풍속이 어지럽고 법도가 혼란함을 늘 탄식하였다. 이후 고향에 강신서당(講信書堂)을 지었는데, 마을의 못된 자들이 그 집에다 불을 지르므로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인적이 없는 곳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연명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산배<山梨> 등 열매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학문에 탐구하였는데, 각처에서 제자들이 몰려와 그 옆에다 서당과 숙소를 지었다. 문하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오물이 쌓이고 흘러내려 부근에 있는 절이 폐할까 염려한 공은 지리산에 기거한지 4년만에 다시 계룡산 고청봉(孤靑峰) 아래 공암동(孔巖洞)에 자리를 옮겨 이후 18년 동안 오로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말년에 임진왜란이 예상되어서 의병장 조헌과 상의를 하였으며,죽기전에 아들 서홍덕,서홍도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날것을 알려고, 서홍도는 부친에 말을 성실히 이행하여 목숨을 구했다.공이 69세로 별세하니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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