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양서원(中陽書院)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중산리 185-2
달성 서씨의 중양 서원(中陽書院)
건립연도는 1794년도. 서섭(徐涉), 서시복(徐時福)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 18년(1794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며 경내 건물로는 망월문(望越門), 상충사(尙忠祠) 강당, 서재, 신문, 전사청(奠祀廳), 고작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서섭(徐涉)은 달성서씨 판서공파 파조로 세종, 문종, 단종 등 3대 임금을 모셨고 벼슬은 대호군을 거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달성 서씨 판서공파의 유래에 보면, 남은(南隱) 서섭(徐涉) 선생(先生)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유학자. 호는 남은(南隱)이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 금호읍(琴湖邑) 어은(漁隱)이다. 부친 승사랑(承仕郞) 광흥창부승(廣興倉副承) 서문한(徐文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조 때 등과한 후, 문종조·단종조에 벼슬을 지냈고, 관직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세종(재위 1418∼1450)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후일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 하여 시골로 내려와 은둔생활과 후학을 기르며 여생을 보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이 김 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로 귀양 보내자, 간신들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을 등용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월사변(寧越事變) 때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이라는 시를 남기고 낙향한 후,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유림들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중양재(中陽齋)·분양서원(汾陽書院)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냈다. 또한 첨모재(瞻慕齋)와 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유지를 기렸다. 저서로 『남은선생집(南隱先生集)』2권 1책이 있다.
서섭(徐涉)의 호는 남은(南隱),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파조(派祖)로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文宗)을 거쳐 단종(端宗)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단종초에 왕족과 간신들의 발호(跋扈)를 경계하여 착간소(斥姦疏)로 개혁을 주장하다가 유배(流配)당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호를 남애(南涯)에서 남은(南隱)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도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문녕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 문륙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 재적소시시(在謫所時詩)와 여손격재(與孫格齋) 업서(業瑞), 계자손설(戒子孫說), 백형친감제문(伯兄親監祭文)들이 포함된 유고(遺稿)와 그 행장(行狀)이 1924년 그가 살던 낡은 집 친정에서 발견되어 늦게나마 그의 충절을 알게 된 후손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아래 담모재(膽慕齋)를 건립, 그를 주향(主享)하고 1994년 그의 자인 서감원(徐次元)과 아울러 두 부자를 배향(配享)하면서 유림에서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개칭 중건(重建)하였다.
서감원(徐坎元)은 성종(成宗)때의 충신이며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구언상소(求言上疏)를 올려 성종(成宗)의 실정을 직담하였다가 충반위죄(忠反爲罪)로 심한 고문을 당한 직신(直臣)인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도 상재되어있으며 문집도 간행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의사(景義祠)를 비롯하여 방 3칸, 대청 1칸의 정침외(正寢外)에 동서의 존성재(存誠齋), 구인재(求仁齋)와 남은선생(南隱先生) 신도비각(神道碑閣)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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