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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页 > 文化 > 서련 판관 본관은. 연산서씨.
文化
서련 판관 본관은. 연산서씨.
2024-07-145

서련 판관 본관은. 연산서씨.

서련판관기념비(徐燐判官記念碑)

위치 ; 구좌읍 동김녕리 김녕사굴 입구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비석 건립 시기 ; 1937, 1972년

해마다 제물로 바치는 처녀를 먹던 큰뱀을 퇴치하여 마을의 화근을 없앴다는 전설의 주인공 徐燐 판관의 기념비 2 기가 김녕굴 입구에 서 있다. 그 하나는 1937년 봄에 東共七이 세운 [判官 徐公 紀念碑]이며, 다른 하나는 1972년 4월 제주판관 서공 사적건립위원회가 세운 [濟州判官徐公燐事蹟碑]이다.

제주도실기(濟州道實記) 등 기록을 요약해 보면 본디 이 김녕굴에는 닷섬들이 항아리만큼이나 굵고 귀가 달린 큰뱀이 살고 있었는데 늘 요사스런 재앙을 부렸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한 번씩 酒食을 마련하여 제사지내고 15세 되는 처녀를 한 사람씩 제물로 바쳤다. 만일 굿을 하지 않으면 그 뱀이 나와 이 밭 저 밭 할 것 없이 곡식밭을 다 휘저어버려서 대흉년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매년 처녀 한 사람씩을 재물로 바친 것이었다. 양반의 집에서는 딸을 잘 내놓지 않았다. 무당과 같은 천민의 딸이 으레 희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무당이나 천민의 딸은 시집을 가지 못했다.

이러할 즈음 조선조 중종때 서판관이 부임하여 왔다. 서련은 고려 시대 외교로 이름을 떨쳤던 서희의 후손으로 열아홉살의 젊은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제주판관에 부임했는데, 이말을 듣고 괴이한 일이라 분개하였다. 예년과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창검으로 무장한 군교 수십명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대기했다. 제(祭)가 끝나자 뱀이 기어나와 제물로 바친 처녀를 삼키려 하므로 서판관과 군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뱀을 죽이고 불태워 버렸다. 이 때부터 재앙을 입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서판관은 제주성으로 돌아온 후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못가 죽어 버렸다고 한다. 증보탐라지를 보면 서련은 중종10년(1515) 4월10일 제주판관 재임중에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1982. 334쪽)  유해는 제주도민의 호송을 받아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덕은동 보개산에 안장되었다.(현장의 안내판)

그런데 전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서 판관이 뱀을 처치하는 것을 본 무당이 '빨리 말을 타고 성안(제주시)으로 가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됩니다.' 라고 말하였다. 서판관은 말에 채찍을 놓아 성안으로 향했다. 무사히 성 동문 밖까지 이르렀다. 이때 군졸 한사람이 '뒤쪽에서 피비가 옵니다.' 라고 외쳤다. '무슨 비가, 피비가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하며 서판관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말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뱀이 죽자 그 피가 하늘에 올라 비가 되어 서판관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현용준의 『제주도 전설』)

서련 묘소는

묘위치는 충남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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