会员登录|免费注册|忘记密码|管理入口 返回主站||保存桌面|手机浏览|联系方式|购物车
企业宗亲第1年

徐氏一家联合会  
加关注1

专业、科学和技术活动/专业、科学和技术活动

搜索
新闻中心
  • 暂无新闻
商品分类
  • 暂无分类
联系方式


请先 登录注册 后查看


站内搜索
 
荣誉资质
  • 暂未上传
友情链接
  • 暂无链接
首页 > 文化 > 서몽호(徐夢虎)
文化
서몽호(徐夢虎)
2024-07-145

서몽호(徐夢虎)

본관은 달성 서씨.

임진왜란 때 활약한 울산 출신의 의병장.

서몽호 의병장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 산35번지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병보(炳甫).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서진(徐晉)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주부(主簿) 서건손(徐乾孫)이며, 아버지는 서면(徐勉)이고 어머니는 영일현감을 지낸 박문옥(朴文沃)의 딸 경주박씨(慶州朴氏)이다. 처는 안복동(安福同)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 : 서건손(徐乾孫 주부(主簿))

할아버지 : 서보(徐普 달성군)

아버지 : 서면(徐勉)

본인 : 서몽호(徐夢虎 의병장)

서몽호(徐夢虎)[1539~1615]는 울산광역시 북구 호계동에서 태어났다. 1609년 당시 울산도호부 동면 농소리에 거주하였으며, 울산군에 속한 웅상면 매곡리[현 양산시 매곡동]에 입향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해 5월 함월산성에서 울산과 경주 지역의 의병장들이 의병 부대를 편성할 때 참여하였다. 5월 7일 병영성 탈환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6월 9일 울산과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 의병들이 결전을 결의한 경주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공을 알려 수문장에 이어 훈련원주부에 제수되었다. 1599년 10월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馬貴)가 울산 서생포에서 회동을 열고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공을 세운 사절들의 위패를 열향(列享)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기문인 「창표당안(蒼表堂案)」에 만도 의용(晩到義勇) 15명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 산35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1년 후손들이 증산사(甑山祠)[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는데, 증산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 복원되었다. 2000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와 2017년 창표사[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31]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증산사(甑山祠)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재실.

매곡동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서몽호이다. 서몽호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고, 수많은 공을 세우자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준겸이 임금에게 그 공을 알려 훈련원주부를 제수받았다. 서몽호가 죽은 뒤에는 충절을 기리고자 영남의 유림들이 건의하여 경상감영의 지원으로 1791년 매곡리에 사당을 지었다. 이때 사우를 증산사라 하고, 당호를 행의당(行義堂)라 하고, 재호(齋號)를 지의재(知義齋)라 하고,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였다.

1791년에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에 복원하였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이다.

후손

경남 양산의 한 시골마을에서 주민들이 마을신문을 직접 만들어 소식을 전하면서 주민들 사이에 소통을 실험하고 있다. 경남 양산시 덕계동 매곡마을. 달성서(徐)씨 집성촌으로 231가구 371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난 2008년 1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이사오면서 이름이 알려졌으나 여느 시골마을과 같이 정감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몇 해 전부터 마을 주변에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외지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원주민과 새주민 간 소통이 단절됐기 때문이었다. 원주민과 외지인들 사이엔 뭔지 모를 벽도 생겼다.

지난해 9월 이 마을로 이사 온 강열우 부산예술대 교수(57)가 이장 서재수씨(65)에게 주민화합을 위해 마을신문을 제작하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마을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제호는 마을 이름을 따 ‘매곡마을신문’으로 정하고 이장 서씨가 발행인을, 한국전력 부장으로 퇴직해 고향으로 돌아온 서웅기씨(61)가 편집국장을 맡았다. 편집국장 서씨는 신문에 독자투고를 한 경험이 전부였고 기자단 역시 신문과는 인연이 없던 50~60대 마을 주민 남녀 3명씩 6명으로 구성됐다.

지난 1월1일 창간호가 나오기까지는 석 달의 준비기간이 걸렸다. 주민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제작회의를 하면서 기사거리를 토론하고, 기자들은 취재를 거쳐 기사를 쓰면 카카오톡으로 기사를 송고했다.

A3 크기의 4면짜리 창간호 1면에는 창간사와 마을소개, 2면은 마을소식, 3면은 새로 이사온 주민이야기, 4면은 마을음악회 등으로 마을소식을 채웠다. 마을신문이 발행되면서 각 가정의 길흉사까지 서로 알게 되면서 원주민과 새주민 간의 벽이 낮아졌다.

편집회의 때 문 후보나 이 마을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서형수 의원의 축사라도 실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서 편집국장은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며 반영하지 않았다.

매곡마을신문은 마을의 주민화합만 이룬 게 아니었다. 신문 제작과정에서 잊혀졌던 마을의 옛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임진왜란 때 이 마을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서몽호 장군, 범을 때려잡은 또 다른 서 장군 등 입으로만 전해내려 온 이야기들이 정리됐다. 일제가 파놓은 금광굴에 얽힌 이야기도 하나둘씩 발굴됐다. 깨끗한 식수를 고민하며서 일본 후쿠오카 에코마을과의 교류를 통해 친환경마을로 변모시키자는 움직임도 일기 시작됐다. 풍물패도 만들어져 오는 5월 가정의 달에 공연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 중이다.

지난 1일 발행된 제2호에는 일본과의 교류, 의병장, 풍물패 소식과 함께 ‘믿거나말거나길’이라는 이름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곁들여진 둘레길 개발 소식도 실렸다. 이장 서씨는 9일 “기사발굴, 머리기사 정하기 등 제작회의를 하면서 신문만 만든 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동네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서씨일가연합회(서일연)'  밴드방